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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장사’ 베트남 산업단지 디벨로퍼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은 제조업 비중이 높다. 북부에만 전기·전자 제조업체가 400여 개를 훌쩍 넘는다.

3월 9일 창간되는 ‘리로케이션 2.0(RE:Location 2.0)’ 매거진의 분석에 따르면, 베트남 북부의 한국 전기·전자 업체 상당수는 삼성 생태계에 속해 특정 산업단지에 밀집해 있다. 이 밀집은 그동안 효율을 거뒀지만, 동시에 이동 비용을 키워 기업을 ‘움직이기 어려운 고객’으로 만들었다.

‘셀러 중심’ 시장을 만드는 한국 기업들

베트남의 산업단지·기성공장(RBF)·임대창고(RBW) 시장은 오랫동안 공급이 제한된 가운데 수요가 강한 구조를 유지해 왔다. 자연스럽게 거래의 기준은 품질이 아니라 ‘지금 입주하거나 당장 활용할 수 있는가’, 즉 ‘가용성’이 됐다. 임차인의 질문이 ‘이곳이 최선인가?’에서 ‘지금 이용할 수 있나?’로 바뀌는 순간, 디벨로퍼의 장사는 쉬워진다.

이 구조에서는 ‘요구가 많은 고객’이 ‘피곤한 고객’이 된다. 전력 품질, 통신, 배수·침수, 소방·환경 규정 이행, 운영 표준화, 유지보수 체계 등에서 편차가 있어도 공간이 채워진다면, 개선을 이끄는 힘은 약해진다.

디벨로퍼 문제라기보다 시장의 신호

여기서 핵심은 도덕성 평가가 아니다. 셀러 마켓에서 디벨로퍼가 시간을 배분하는 기준은 대체로 합리적이다. 더 큰 면적, 더 높은 단가, 더 빠른 의사결정, 더 분명한 확장 계획이 있는 고객이 우선이다. 국적은 중요하지 않다. ‘더 큰 규모의 거래’와 ‘더 낮은 불확실성’이 먼저다. 지금 베트남 내 디벨로퍼들이 일제히 중국 기업을 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반대로 이미 입주해 오래 운영 중인 임차인은 추가 면적이 제한적이고, 운영 이슈(유지보수·민원·규정 대응)가 반복되며, 이전 비용이 커 쉽게 나가기 어렵다. 이는 시장에서 ‘이미 확보된 수요’로 취급되기 쉽다. 한국 기업이 체감하는 ‘가두리’ 대우는 결국 기존 고객을 더 챙길 유인이 사라진 시장 구조에서 나온다.

심화하는 노후 산업단지 리스크

일찌감치 베트남에 진출한 일부 한국 기업들은 노후 산업단지에서 ESG(탄소배출 등), 소방·환경, 전력·통신, 침수 대응 같은 새로운 기준을 맞춰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문제는 이것이 ‘고쳐 쓰면 될’ 수준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프라 업그레이드가 지연될수록 리스크는 단순 비용이 아니라 납기, 품질, 감사 문제로 전환된다.

그런데 많은 기업은 이를 외부에 요구하기보다 내부에서 메운다. 야근, 외주, 임시 설비, 관리자 개인의 경험으로 공백을 채우면 당장은 돌아간다. 이것이 더 큰 문제를 낳는다. 시장에는 ‘이 정도 조건에서도 운영할 수 있다’는 신호가 남고, 개선 압력은 더 약해진다. 숨겨진 비용은 결국 품질 변동, 납기 지연, 안전사고, 감사 리스크로 표면화되고, 기업은 더 급해진다. 급해진 기업은 다시 ‘즉시 입주할 수 있는 공간’을 선택한다.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될수록 디벨로퍼의 장사는 더 쉬워진다.

‘연장 계약 매달리기’가 협상력을 낮춘다

일부 기업은 새로운 대안을 찾기보다 연장 계약을 우선한다. 단기적으로는 생산 연속성을 확보하지만, 시장에는 ‘이 고객은 떠나기 어렵다’는 신호가 더 강하게 쌓인다. 디벨로퍼 입장에서는 기존 고객의 요구를 반영해 설비 투자를 늘릴 유인이 줄어든다. 결과적으로 기업은 ‘연장’을 얻는 대신, 개선(업그레이드)이라는 본질적 거래를 놓치기 쉽다.

불평보다 ‘구매 기준’이 달라져야

‘고객이 바뀌어야 시장이 달라진다’는 말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이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다. 즉, 한국 기업은 ‘가격·면적·즉시 입주’만 보는 고객이 아니라, 운영할 수 있는 미래(규정 준수·인프라·리스크 분담)를 구매하는 고객이라는 신호를 만들어야 한다.

시장에 영향을 주는 행동 변화는 여럿이다. 다만 이를 직접적으로 요구하기보다, 선택 방식을 조금 바꾸는 쪽이 더 효과적이다.

첫째, 중요한 결정을 ‘마감 직전’에 맞추지 않는 것이다. 만기나 증설 일정이 눈앞에 닥친 뒤 급하게 자리를 찾기 시작하면, 시장은 자연스럽게 ‘가용성’만을 기준으로 움직인다.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시장은 고객을 다시 보게 된다.

둘째, 연장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최소한의 개선 일정과 책임의 경계를 문서에 담아 두면, 그 단지는 ‘단순한 임대 공간’이 아니라 ‘운영 인프라’로 평가받게 된다.

셋째, ‘한 번 들어오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인상을 서서히 지우는 것이다. 굳이 떠나겠다고 선언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일부 라인을 분산할 수 있는 ‘세컨드 사이트’, ‘외주 구조의 재편’, ‘핵심 공정의 백업 플랜’처럼 이동성을 확보해 두면, 시장은 고객을 ‘고정 수요’로만 여기지 못한다. 이는 결국 리로케이션을 위한 예열 과정이기도 하다. 당장은 아니라도 언제든 옮길 수 있는 상태는 기업의 리스크를 크게 줄인다.

이런 작은 변화가 쌓이면 시장에는 큰 변화가 생긴다. 시장을 바꾸는 조용하지만 확실한 방법은 ‘머무름’이 아닌 ‘이동’, 곧 재배치를 준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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