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12월. 얼마 남지 않은 2025년을 돌아보면, 올해는 글로벌 경제 질서가 매우 ‘거칠게’ 재편된 한 해였다.
자국 중심주의가 국제경제의 핵심 가치가 되었고,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투하한 ‘관세 폭탄’은 신흥국을 포함한 전 세계 공급망을 뒤흔들었다. 이 과정에서 ‘힘과 전략’을 갖춘 국가만이 생존할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이 확인됐다.
‘다른 국가’로 바뀌어 가는 베트남
전례 없는 혼란 속에서도 베트남의 민첩한 대응과 판단은 인상적이었다.
미국의 관세 정책으로 주요 수출국이 흔들리는 가운데 베트남은 신속한 협상과 정책 조정을 통해 충격을 최소화했고, 동시에 경제 체질을 고도화하는 전략을 추진했다. 컨설팅 업체 KPMG가 최근 내놓은 ‘2026년 베트남 전망 보고서’의 머리말에서 “베트남이 글로벌 불확실성과 변화하는 교역 환경 속에서도 놀라운 회복력과 민첩성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한 이유이다.
베트남 정부는 고부가 제조, 디지털 전환, 기후 대응, 지역 분권형 성장이라는 새로운 국가 모델을 분명히 선택했다. 과거의 베트남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한국 기업을 대표하는 코참(KOCHAM)의 인식 수준이 여전히 ‘과거의 제조업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 묶여 있는 코참
최근 베트남 비즈니스포럼(Vietnam Business Forum, VBF)에 제출한 코참의 제안은 ▲애로 해소 ▲근시안적 규제 완화 ▲혜택 유지에 머무르고 있다. 이는 최근의 산업·정책 패러다임과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코참이 베트남의 ‘정책적 대전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애초에 큰 관심이 없다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코참은 이러한 제안이 한국 기업들이 직면하고 있는 실질적인 문제를 정부에 전달하기 위해서였다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VBF는 단순한 민원 창구가 아니라, 국가의 중장기 정책 방향을 논의하는 ‘정책 대화 플랫폼’이다. 각국 상공회의소는 이 자리에서 산업 변화에 기반한 전략적 제안을 제시하며 정책 정합성을 맞춘다.
그럼에도 코참은 심지어 정부를 향해 기업 철수를 언급하거나 ‘초기에 기여한 기업에게 우선 부지 배정’ 같은 감정적이고 구시대적인 제안도 서슴지 않았다.
‘베트남과 함께 가는’ 다른 상공회의소
베트남 유럽상공회의소(EuroCham Vietnam)의 경우 ‘정책 정합성’을 기반으로 미래지향적인 제안을 한 대표적인 케이스다.
(관련 내용: 유럽 기업이 꼽은 ‘고통점(Pain Points),’ 가까운 미래 변화를 읽는 실마리)
유로참은 ▲탄소국경조정제도(CBAM)·탄소시장 도입 지원 ▲전력 시장 개혁 ▲디지털 규범·데이터 규제 개선 ▲기후·지속가능성 제도 정비 등에 초점을 맞췄다. 이는 베트남이 향하는 방향과 일치한다. 베트남 정부가 유럽의 제안을 ‘파트너십 수준’에서 받아들이는 이유다.
베트남 일본상공회의소(JCCI)도 대체로 베트남 정부가 당장 개선할 수 있는 ‘현장형 의제’를 도출했다. 이는 제조국 일본의 경험을 접목한 전략적이고 실무적인 접근이라고 할 만하다.
(관련 내용: 일본 기업의 문제 제기에서 포착하는 2026 베트남 투자·운영 리스크)
이들은 단순히 ‘규제를 완화해 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베트남의 전략적 방향성이 무엇인지 먼저 읽고, 그 위에 자국 기업의 요구를 설계하는 식이다.
반면 코참은 규제 완화와 혜택 유지에 집중하는 ‘민원 해결 모델’에 매몰되어 있다. 한국이 베트남의 최대 투자국 중 하나임에도 코참의 제안은 전략적 깊이가 낮고, 미래지향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국 기업 전체의 리스크
코참의 역량 부족은 단순히 일개 단체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이는 앞으로 5년, 10년 동안 한국 기업의 전체 경쟁력에 직결되는 ‘구조적 위험’이다.
베트남 정부가 추진하는 각종 새로운 정책, 예를 들어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 ▲디지털 제조 생태계 조성 ▲에너지·전력 시장 개혁 ▲기후·탄소 규제 강화 ▲산단 재배치 2.0 등은 한국 기업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전환 과정에서는 ‘정책 방향을 읽고 적시에 대응하는 기업’에게 거대한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즉, 코참의 전략 부재는 한국 기업들의 기회 손실을 넘어 장기적으로 경쟁력 훼손과 더 나아가 생존 위협으로 이어지는 국가 단위의 리스크다.
분열된 코참 구조… 정부와 대사관 방임 속 문제 키워
더 근본적인 문제는 베트남의 코참이 하노이와 호찌민으로 양분된 이중 구조라는 점이다.
코참 하노이는 ‘주 베트남 한국상공인연합회’로 1999년 1월 베트남 한국기업협회(The Korean Business Association in Vietnam)라는 이름으로 하노이 인민위원회로부터 베트남 내 외국 기업 협회 설립 허가를 받았다.
코참 호찌민은 ‘베트남한인상공인연합회’로 2003년에 설립되었으나, 공식 협회가 아닌 ‘법정 민간경제단체’로 허가를 받았다. 다만 코참(KOCHAM)이라는 영문명과 도메인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
정치의 중심지인 하노이에서 허가를 받은 공인 조직인 코참 하노이와 회원 수는 다소 적지만 탄탄한 경제적 기반을 갖춘 코참 호찌민은 법적 지위·협상력·회원 구성·명칭까지 서로 다르다.
이런 구조에서는 어느 조직이 한국 기업을 대표하는지가 명확하지 않고, 베트남 정부와의 정책 대화에서도 일관된 메시지를 만들기 어렵다. 이는 단순한 조직 문제가 아니다. 대표성의 혼란은 곧 한국 기업 전체의 정책 영향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적 분열을 방치해 온 가장 큰 책임은 한국 정부와 주 베트남 대사관의 조율 노력 부재에 있다. 즉, ‘책임 회피형 중립’이 만들어 낸 결과다. 국제적으로 상공회의소는 대사관과 긴밀히 연계해 단일 대표체계를 갖추고 있는데, 한국은 이를 조율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단일 거버넌스 체제와 전문성 확보 절실
지금 피해자는 현지에서 뛰는 대다수 한국 기업이다. 제대로 된 ‘전체의 목소리’를 반영하지 못하고, 새로운 흐름에 편승하지 못하면서 기회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통합이 아니다.
코참의 단일 거버넌스 구축과 함께 조직 자체도 거듭나야 한다. 베트남에서 한국 기업의 미래는 단순한 민원 해결이 아니라 ‘정책 변화’와 ‘산업 구조 전환’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이를 대비하는 데 달려 있다.
코참은 이제 ‘친목 중심의 운영 구조’를 버리고, 싱크탱크형 전문위원회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또한 데이터에 기반해 정책을 분석하고 국가 전략과 정합성을 갖춘 어젠다를 설정해야 한다. 이러한 재편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한국 기업은 베트남의 대전환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새로 열리는 기회를 경쟁국에 내주는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코참 하노이·호찌민 지도부, 한국 정부, 주베트남 대사관이 지금 한 테이블에 모여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미래가 여기에 달려 있다.
이성주
Founding 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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